부모님은 김천을 떠나 인천에서 몇 년 지내셨어요. 그때 저는 인천 신광국민학교를 다녔죠. 학교 바로 옆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나봐요. 운동장에서 보이는 망루 초소와 초콜릿을 주던 미국 병사 생각이 어렴풋이 나니까요. 서울에 아버지를 만나러 제물포역까지 걸어가면서 공장벽마다 페인트로 쓰여 있던 ‘반공방첩’이라는 글자도 기억에 선연합니다.
비가 오면 친구들과 담벼락에 기대어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하염없이 듣고 있었지요. 친구들과 골목길을 몰려다니며 구슬치기, 딱지치기, 오징어가이생을 하면서 함께 어울리는 삶을 배웠겠지요.
국민학교 4학년 여름방학에 인천에서 서울 사당동 판자촌 동네로 이사를 했습니다. 우리 집은 벽돌을 팔기 위해 쌓아놓은 야마 지붕을 덮고 밑에 구들을 놓았기 때문에 그런대로 추위를 피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많은 친구들 집에는 구들도 없었습니다.
우리 집은 벽돌공장에 무허가로 지었기 때문에 종종 철거를 당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름에는 나무로 틀을 짜고 벽은 모기장으로 둘러치고 지붕만 슬레이트로 덮는 조립식 집을 만드셨지요. 철거반이 오면 집을 차곡차곡 뜯었다가 그들이 가고나면 다시 조립하곤 했습니다.
공부라면 시험 직전에 벼락치기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나마도 하는 아이들이 드물었기 때문에 1등은 도맡아 했습니다. 주변의 어른들은 공부 잘하고 착하다고 칭찬이 자자했었지요. 이런 환경으로 인해 나는 자존심이 세고, 지기 싫어하고, 칭찬에 민감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제가 살아온 궤적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참 운이 좋은 편입니다. 중학교 배정 추첨에서 저는 공통학군인 선린중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당동 판자촌 동네에서 강북 공통학군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지요. 그후 고등학교 갈 때에도 또 명문 양정고에 무시험으로 배정되었지요. 또 시의원 기호 추첨을 할 때도 꼭 그 당시 인기 있는 정당의 번호를 받았습니다. 추첨을 하면 꼭 이득을 보는 인생을 살았다고나 할까요.
선린중학교 시절에 성적은 학급에서 잘해야 3등쯤 했으니 부모님께 실망을 드렸을 겁니다. 국민학교 때는 전교 1등을 도맡아 했거든요. 그렇다고 어머니께 야단을 맞은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부모님은 나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계셨는데도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제 성격으로 보아서 언젠가는 나아지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는 저를 늘 자랑스러워 하셨고, 어머니는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하셨습니다.
아주 잘 살고 공부도 잘한 정태욱이라는 친구가 있었죠. 2학년 때 늘 그 친구를 따라다녔습니다. 그 친구 집이 맨션 아파트여서 겨울에 반팔 티셔츠 입은 아가씨도 보았고 실내 수영장도 가보았지요. 저를 서울 사람으로 만든 문화 체험이었어요. 그 체험을 통해 양가감정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 다음에 크면 저렇게 살고 싶은 참 부러운 삶이기도 했고, 왠지 부자는 미운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감성적 불만이었어요.
체구가 말라서 항상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던 차에 삼각지에 있는 쿵푸 도장에 다니게 되었지요. 항상 운동을 하는 습관을 그때 익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군병사들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 이야기 넷, 일기 쓰기
양정고에 배당된 것은 제 일생일대의 행운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리 민족의 기개를 세계에 떨친 손기정,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양정은 민족애와 도전정신의 상징입니다. 만리동 고개에 우뚝 선 양정고는 저에게 이상과 용기와 뜨거운 심장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저는 일기를 통해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양정인으로 성장했습니다. 날마다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을 설게해보고 반성해봄으로써 성숙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저는 교사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미래의 꿈 이외에 이성에 대한 그리움과 친구에 대한 우정,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 이러한 것들이 주로 일기의 내용이었습니다.
재야활동을 할 때 일기 쓰기는 금지 사항이었습니다. 심지어 사진 찍는 것조차 금지 사항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비밀 활동에서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검거되면 증거가 되니까요.
국회의원이 되어서야 일기를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꿈을 키우기 위해 고등학교 때 쓰기 시작한 일기였습니다. 지금은 꿈을 정직하게 실천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한 약속을 늘 되새기고 저의 양심과 대화하기 위해 계속 일기를 쓰겠습니다.
★ 이야기 다섯, 모래시계 세대
1979년 참으로 대망의 서울대 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성취감은 잠깐이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당시 양정고 선배였고 나중에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한 유기홍 선배의 권유로 이념 서클인 ‘역사철학회’에 가입하였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험난한 이정표가 되리라는 것을 당시는 몰랐습니다.
엄청난 지적 탐구의 과정에서 저는 나름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만들어갔습니다. 요컨대, 정의의 편에서, 권력과 부로부터 소외된 민중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실천을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거치른 들판에 솔잎되리라’는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우리 세대에게 시민항쟁의 위대한 힘을 만끽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피어린 5·18 광주의 처절한 분노를 우리 세대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소의 ‘서울대 무림사건’이라는 반정부 학생운동 조직 관련자로 경찰에 연행되어 장제징집당했습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반정부 학생운동가에 대한 응징의 수단으로 여기는 군사정부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1985년 제대를 하고 군사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망설임 없이 노동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자 조직을 하고 파업을 하였습니다. 노동운동은 우리 사회의 엄연한 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7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시민항쟁의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소박한 국민의 뜻이 폭풍의 힘을 가졌음을 깨달았습니다.
1989년 해방 후 처음으로 모든 반정부 단체가 망라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발족하는 데 참여한 후 저는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교도소에서 제가 살아온 20대의 10년 세월을 돌아보았습니다. 혁명과 사랑의 열정으로 지나온 짧지 않은 나날이었습니다. 독재에 신음하던 대한민국의 젊은이에게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모래시계 세대’라고 부릅니다.
★ 이야기 여섯, 육군 병장 임병장 입니다!
우리나라 가장 동북단인 강원도 고성군 22사단 철책선에서 근무했습니다. 한참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갔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보안사에서 녹화사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특기가 106인 보병으로서 90밀리 무반동총을 메고서도 힘든 행군을 겪어냈습니다. 밤새 철책을 지키는 올빼미 근무였지만 동터오는 조국 산하를 날마다 뜨거운 가슴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육군 대장보다 높은 것이 육군 병장이라고 우리 땅개들은 믿었습니다. ‘충성! 육군 병장 임해규입니다’라고 외칠 때마다 가슴이 뻐근하였습니다. 여자들은 군대 이야기를 가장 싫어하는데, 남자들은 악착같이 군대 이야기를 합니다. 조국에 대한 헌신을 뼛속 깊이 새긴 자랑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군인들은 대한민국을 정말 사랑합니다.
★ 이야기 일곱, 때 아닌 연애 편지
제 아내 이영은은 저를 만나서 참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제가 군인일 때 제 친구 동생으로서 저와 위문편지를 주고받던 사이였습니다. 그후 제 권유로 노동운동을 같이 하게 되었고, 급기야 1988년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우리 결혼생활은 평탄치 못했습니다. 첫아이 종빈이 백일잔치는 아내가 안기부의 추적을 몇 차례 따돌리고 만나 경복궁에서 치렀습니다. 돌잔치는 서울고치소 면회실에서 앞을 가로막은 유리문 너머로 고생하는 아내와 종빈이를 애타게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더 이상 쫓겨다닐 필요 없고 면회 오면 만나는 남편이 그 전보다 덜 걱정스러웠답니다.
면회 시간에는 충분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통씩 긴 편지를 썼지요. 저는 편지를 통해 고생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감옥에서 나가면 모범 남편, 모범 아버지가 되겠다는 공수표도 남발했었지요. 때 아닌 연애편지였지만 그때 마음을 정말 짠하였습니다. 아내는 저를 대신해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저 대신 부천시의원에 나가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그냥 묵살해버렸습니다. 저와는 달리 사람을 좋아하고 낙천적인 아내가 더 좋은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 이야기 여덟, 시민 뜻대로!
1995년 처음으로 2대 부천시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공직에 취임했지요. 중학교 특수학급을 졸업한 정신지체 장애학생들이 진급할 고등학교가 없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장애학생 학부모들, 특수교사들과 힘을 합쳐 부천정보고와 부명정보고에 특수학급이 만들어지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의원 노릇을 한 것 같아 면이 섰습니다.
부천시민들께서 1998년 3대 부천시의원에 또 뽑아주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찾아와 책을 읽을 수 있는 마을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작은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많은 분들이 뜻과 힘을 모아주셨기 때문에 맺은 결실이었습니다.
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은 시민의 좋은 뜻을 모아 좋은 일에 시민이 세금이 쓰이게 한 일이었습니다.
2002년 좀더 큰 뜻을 품고 부천시장에 도전했지만 공천 경선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격려해주셔서 부천시의원에 다시 도전해 4대 부천시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더 겸손해지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더 치열하게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각오하였습니다.
★ 이야기 아홉, 국회의원 아빠
우리 가족은 아내와 아들과 딸, 그리고 종종 다녀가시는 어머니까지 다섯입니다.
한시도 마음 편한 날 없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죄송합니다. 남편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아내에게도 할 말이 없지요. 자랄 때 아버지의 정을 주지 못했는데도 잘 성장해 어엿한 청년이 된 아들 종빈이가 대견할 뿐입니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을 짓게 만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 하빈이는 이제 재롱둥이를 벗어나 점점 숙녀가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좋은 아빠’라는 말 앞에서 고개가 절로 떨구어집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지요. 하빈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우리 가족 모두 함께 해변으로 놀러가자고 하더군요. 저는 선뜻 약속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전해 겨울방학 때도 스키 타러 한번 가기로 해놓고 가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좀처럼 만들지 못하는 생활은 그뒤로도 쭉 계속되고 있네요.
나랏일을 잘하면서 가족에게도 잘하는 국회의원이 되기란 정말 어려운가 봅니다.